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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전 4월 4일, '꼭 기억해야 합니다'

기사승인 2017.04.03  20:3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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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 남부시장에서 일어난 '4.4만세운동'

98년 전인 1919년 4월 4일 솜리 장날 대교농장(현 남부시장 인근) 앞에서 일어난 ‘4.4익산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돼 나갈 때 오산 김내문의 집에서 아들 김만순, 최대위 목사, 김영인 선생과 함경도 갑산탄광에서 금광사업을 하면서 독립자금을 조달해 만주 등으로 송금 하는 등 구국운동에 열중하던 문용기 선생이 3월 중순경 김내문 씨를 찾아 4월 4일 낮 12시를 기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 시켜 나가기로 합의했다.

3월 초부터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지도자들에게 있어 4월 4일은 일제가 이 땅에서 감행한 폭압적 통치의 종지부를 찍는 디-데이(D-day)날이었다.

   
 
기독교측 지도자 문용기, 김내문, 정진영, 최대진, 박영문, 오덕근, 박병렬, 박공업, 백낙규 등과 천도교 지도자 박영진, 이중렬, 이유상, 송일성, 이형우, 노충만, 최재봉 등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수 만 장씩 준비하는 등 이들에게 있어 4월 4일은 생명과 젊음을 바쳐 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기필코 쟁취해야만 하는 최후의 날이었다.

오산면 남전교회에서는 김내문 집에 모여 여러차례 숙의한 대로 이날 시위는 3대로 나눠 편성하고 1대는 최대진 목사(당시 최목사는 노회로 인해 참여하지 못함 - 김영인 교사의 요청으로 실제로는 최대위 학생이 주도)가 이리역과 평화동 쪽에서 대교농장으로 진출했다.

2대는 문용기 선생이 무내미 방향에서 구 시장으로, 3대는 김내문 감찰의 아들인 김만순이 동이리 방면에서 구 시장으로 진출해 한곳으로 운집된 대열은 수백 명의 전위대로 기세를 높였다.

문용기 선생의 곁에서 독립운동이 시작된 이래 항상 잔심부름을 도맡아오던 서울 중동학교에 재학 중인 김종현, 김철환, 이시웅, 최대위 등과 3월 4일 군산시위를 촉발시킨 쎄브란스 의전에 김병수 학생과 또는 익산지역의 민립학교 학생들로 남전 도남학교 김영인 선생을 필두로 동련 개동학교, 고현 경신여숙, 춘포와 웅포 지역민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참여 하고 있었다.

   
 
당황한 헌병대는 소방대와 농장을 지키던 수백 명의 자위대까지 동원하고 칼과 총 갈구리로 무장하고 나왔다. 이렇게 위협을 느낀 일본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탄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앞에서 시위를 이끌던 지휘부 인사들도 일사각오로 무장돼 있었기 때문에 일보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쳐나간 이들은 팔봉 배못(현 이제마을)에 사는 김종길(남풍이)선생이 다리와 머리에 총을 맞고 ‘억’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대열의 맨 앞에서 시종 시위를 이끌어 나가던 문용기 선생이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태극기를 높이 들고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앞으로 진출해 나가고 있었다.

헌병대는 뒤에서 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가 헌병 몇 명이 그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나와 긴 칼을 높이 들어 만세를 부르고 있는 그의 오른손을 내리쳤다. 만세소리와 함께 태극기는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높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해 나갔으나 극악무도한 일제의 헌병은 또 다시 그의 왼손을 내려치니 태극기가 다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다시 일어나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다시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앞을 향해 나갔고 헌병들은 다시 달려들어 착검한 총으로 사정없이 옆구리와 배를 찌르고 쓰러져 있는 그의 머리를 계속해 가격했다.

문용기 선생은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를 조선독립에 바치오”라고 크게 외치면서 숨을 거뒀다.

   
 
결혼식을 올린지 겨우 2개월도 지나지 않은 박영문은 아버지 박응춘과 어머니 이양신 그의 아내와 함께 아침식사를 마치고 만세현장으로 가기 위해 마당으로 나왔다. 그의 신부도 신랑을 따라 나왔다.

그의 신부가 싸리문 기둥을 잡고 서서 "무사히 다녀오라"고 인사를 한 그녀를 바라 본 박영문은 16세의 꼬마 신랑으로 신부의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인사 소리를 뒤로 한 채 그의 생각에는 오로지 만세현장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는 문용기 선생의 등 뒤에서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하는 그에게 착검한 일본 헌병들이 양쪽에서 달려들었다. 하지만 헌병들은 그의 복부를 사정없이 찌르고 총 개머리로 내리쳤다. 그는 배를 움켜쥐고 앞으로 ‘억’하고 쓰러졌으나 대한독립을 위해서는 이대로 죽을 수가 없다는 신념으로 다시 일어났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은 다른 사람들을 뒤쫓다가 박영문 학생회장이 서 있는 쪽으로 달려와 사정없이 그의 가슴과 이미 큰상처가 있는 배를 다시 찔렀다. 붉은 피가 적삼을 적셔 내리면서 밖으로 내품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서려는 순간 찰상을 입은 복부에서 내장이 땅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위 기사는 익산독립운동기념사업회 황성근 전 대표가 작성한 내용을 요약했습니다.]

오명관 기자 iscmnews@daum.net

<저작권자 © 익산시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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