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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유래] 넉넉한 인심이 살아있는 함라(咸羅)

기사승인 2014.01.05  2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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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함라면(咸羅面)은 조선시대 함열현(咸悅縣)의 관아가 있던 중심지였다. 호남가의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인데...’에서 함열은 지금의 함라면을 말하는 것이다.

함라는 삼한시대에는 함해국으로, 백제 때에는 감물아현(甘勿阿縣)이라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 때 함열(咸羅)로 고쳐 불렀다. 조선초에는 용안과 병합해 안열현(安悅縣)이라 했다가 다시 함열현(咸悅縣)으로 했다.

   
 
하지만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고 함열역이 와리(瓦里)에 세워지면서 와리 일대가 함열면(지금의 함열읍)으로, 옛 함열현 일대가 함라면으로 되었다.

함라(咸羅)라는 지명은 함라(咸羅)가 함열(咸悅)의 별호이기도 하지만 옛 함열현청의 주산인 함라산(咸羅山)에서 그 유래를 찾고 있다.

함라면의 중심은 함열리(咸悅里)로 이곳에는 약 650년이 된 수동(壽洞)마을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함열 관아가 있던 곳으로 함라노소, 3부잣집 등이 있는 명실상부 함라면의 핵심 지역이다.

수동마을은 본래 머릿골이라는 의미로 수동(首洞)이라 했는데 이것이 훗날 수동(壽洞)으로 바뀌었다. 또한 수동을 식골, 숫골로도 부르는데 이는 으뜸가는 마을이라는 의미의 한자음 수(首)와 우리말 ‘골’이 합쳐져 부른데서 연유했다.

이외에도 함열리에는 이곳이 옛 함열현의 중심이었음을 말해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있다. 향교동 또는 생기골로도 불리는 교동(校洞)은 함열향교가 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큰 은행나무가 있는 행동(杏洞)은 옛 재곡역(才谷驛)이 있는 역마을이어서 역말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함라면 함열리에서 숭림사로 이르는 골짜기는 금곡(金谷)으로 원래 소를 많이 매던 산기슭 옆이므로 소매골, 쇠실이라 했지만 이를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금곡(金谷)으로 바뀌어 의미가 엉뚱하게 변했다.

신대리 어등마을은 굽은 등성이라는 ‘엇등’에서 유래했다. 어등마을을 광대밭이라고도 하는데 비가 많이 와도 수일간이면 논밭이 금방 마르는 이곳 지형을 마치 광대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함라에서 웅포로 가는 고갯길, 칠목재는 길목이라는 말에서 왔다. 고갯길 옆의 ‘길목’이 전라도 사투리 ‘질목’이 되고 이것이 다시 거센소리로 변해 ‘칠목(七牧)’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고갯길 일대에 옻나무 즉 칠나무가 많아 칠목(漆木)이라 했는데 한자가 너무 어려워 칠목(七牧)으로 되었다는 설도 있다.

넉넉한 인심이 살아있는 함라는 유서깊은 마을이다. 함열현 관아터와 함열향교, 이배원․김안균․조해영 가옥의 3부잣집과 아기자기한 돌담길을 둘러보며 함라의 옛 영화를 추억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오명관 기자 iscmnews@iscmnews.co.kr

<저작권자 © 익산시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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