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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속 잠들었던 수장이 1500년만에 깨어나다

기사승인 2020.01.21  23: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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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입점리 고분(사적 제347호) 출토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지난 10일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관장 신상효) 새 전시실에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익산 입점리 고분은 1986년 마을 학생들에 의해 2차례에 걸쳐 우연히 발견된 무덤 떼이다. 발굴 결과 21기에 달하는 고분이 금강 변에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백제 양식 무덤인 굴식 돌방무덤이 이곳에 만들어진 시기는 한성기 말~웅진기 초인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추정된다. 금강하구까지 뻗어 나갔던 백제의 영향력을 읽을 수 있다.

   
▲ 항공촬영된 익산 입점리고분군 전경(사진제공 = 국립익산박물관)

무덤 안에는 금동으로 만든 관과 신발, 중국제 청자 등 다수의 유물이 껴 묻혀 있었다. 금동관과 신발은 고대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와 신분 권력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백제가 영역확장을 위해 지역의 유력 세력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위세품의 성격으로 제작·하사(賜與)한 것으로 추정된다.

금동관은 나뭇가지 모양(樹枝形) 장식 파편 3점과 띠 모양 관테(臺冠) 파편 10여 점이 고깔 모양 관(帽冠)은 물고기 비늘무늬 금판과 대롱 장식, 그 밖에도 봉황·연꽃무늬 세움 관장식 수 점이 눈길을 끈다. 금동신발은 바닥에 스파이크와 같은 돌출된 장식, 마름모꼴무늬 속 세 잎 무늬, 얇은 금동 판을 다루는 기술에서 당시 발달한 금속공예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 3. 익산 입점리 고분군 출토 봉황무늬 금동관 장식(사진제공 = 국립익산박물관)

과학적 분석 결과 99% 내외의 순금에 가까운 금을 합금재료로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백제에서 고순도의 금을 분리하는 제련, 정련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금동관과 신발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백제와 정치·문화적으로 관계가 깊었던 일본에서도 출토됐다. 서산 부장리, 공주 수촌리, 나주 신촌리 등지와 일본 구마모토현 에다후나야마 고분(熊本縣 江田船山古墳) 출토품들은 주변 지역까지 미쳤던 백제의 정치적 위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 익산 입점리고분군 출토 금동관모(사진제공 = 국립익산박물관)

신상효 관장은 “익산 입점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금동신발은 금강의 수장과 백제와의 긴밀한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재로서 국립익산박물관에서 꼭 봐야 할 전시품”으로 손꼽았다.

   
▲ 익산 입점리고분군 출토 금동신발(사진제공 = 국립익산박물관)

한편 이번 전시에서는 관람객들이 입점리 고분군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무덤 구조를 모형으로 제작하고 영상자료로 발굴 경위와 출토 문화재를 더욱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 출토된 백제의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익산 입점리 고분 출토품과 비교할 수 있도록 종합정보안내시스템(KIOSK) 기기를 설치해 이해를 도왔다.

1500년 만에 금강하구가 바라보이는 언덕에서 깨어나 마한, 백제의 터에 찬란하게 피어난 입점리 고분의 모습은 현재 국립익산박물관 3실(역사문화실)에서 만날 수 있다.

오명관 기자 iscmnews@daum.net

<저작권자 © 익산시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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