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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4일 익산독립만세, '문용기 열사를 기억하라'

기사승인 2018.04.02  20: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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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시 오산면 남전리에는 익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가 있다. 1897년 10월 세워진 남전교회인데 1919년 4월 4일 독립만세운동의 순국자인 문용기 열사가 장로로 있던 곳이다. 그는 익산시 오산면 관음마을 출신으로 남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문용기 열사는 계몽운동에 관심을 가졌는데 전남 목포와 함경도 갑산 등지로 활동반경을 넓혔다. 신학문을 통한 계몽운동에 관심이 있었던 문용기 열사는 옥구 영명학교와 목포 영명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비밀운동 조직을 확산시켰다.

   
 

1919년 고종 인산날 즈음 3·1만세운동에 자극 받은 문용기 열사는 익산으로 귀향해서 박도현, 장경춘 등 기독교 인사들과 비밀히 만나 솜리(전북 익산의 옛 지명) 장날인 4월 4일에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한다. 당시 솜리는 일본군 보병중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만세운동을 펼치기에 어려운 조건이었다.

군중의 수는 점차 늘어 시위대의 기세 올라

1919년 4월 4일 정오 솜리 장터에 300여 군중이 모여들었다. 삼엄한 검문검색을 피해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의해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그러자 경찰은 헌병대를 출동시켜 해산을 명령했다. 시위대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보병부대까지 출동하는 등 강력히 제지했으나 시위 군중들은 더욱 큰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의 만행과 숭고한 죽음

   
▲ 오산면행정복지센터 주차장에 마련돼 있는 문용기 열사 충혼비(사진제공 = 익산시)

일제는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 명을 동원하여 창, 칼, 총, 곤봉, 갈구리를 휘두르며 무력진압을 시작했다. 시위 군중은 물러서지 않았다. 만세운동이 계속됐다. 헌병대는 급기야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다. 여기저기 비명이 일어나고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때 문용기는 의연히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자 일본인 헌병이 칼을 휘둘러 문용기의 오른팔을 내려치니 팔과 함께 들고 있던 태극기도 땅에 떨어졌다.

문용기는 분연히 일어났다. 남은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다시 전진했다. 헌병은 남은 왼팔마저 베어버렸다. 두 팔을 잃었지만 문용기는 계속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일본 헌병이 가슴과 배를 사정없이 난자하여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는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는 장엄한 의용(義勇)의 화신이 되기로 마음먹은 듯 했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으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산 국민이 되게 하겠소” 마침내 문용기는 숨을 거두었다. 41세의 나이였다. 이날 만세 시위에서 문용기 외에도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서정만이 사망했고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일제는 39명의 시위 군중을 체포하는 등 만세시위가 번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익산지역에서는 4·4 만세운동을 계기로 독립에 대한 의지가 더욱 확산됐다.

4·4만세운동의 주역의 희생정신을 기리며

   
▲ 오산면에 위치한 남전교회(사진제공 = 익산시)

열사의 붉은 피와 의로운 영혼의 음조였을까. 마침내 대한민국은 독립을 맞았다. 독립만세운동을 이끈 문용기 열사에게는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독립기념관과 군산 구암교회 3·1운동 기념관에는 순국 당시 문용기 열사가 입고 있던 피 묻은 두루마기 등 혈의(血衣)를 전시하여 일제의 만행을 증거하고 우리에게는 나라 사랑의 소중한 교훈을 일깨워 주고 있다.

1949년 4월 29일, 당시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익산 남부시장(익산시 주현동 115)에 순국열사비가 익산시민들에 의해서 세워졌고, 오산면행정복지센터에는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을 기리는 충혼비를 세우며 숭고한 모습을 전하고 있다.

문용기 열사 동상 제막

광복 70주년을 맞아 지난 2015년 익산시민들이 지역의 대표 독립운동가인 문용기 열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주현동 순국열사비 일원에 동상을 세웠다. 무엇보다 시민들이 직접 계획해 동상을 세웠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다.

추념탑 안내문에는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치욕적인 36년간의 일제강점기하에 익산 지역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의병활동과 이리남부장터 4・4만세운동을 지휘하던 중 왜적의 총칼에 장렬히 순직하신 문용기 열사 등 독립운동을 펼친 위대한 선열들의 항일독립 정신을 기린다’고 쓰여있다.

이는 동상 하나에 그분의 위대한 민족정신과 숭고한 독립의지를 온전히 담을 수는 없지만 역사의식을 바로세우고 후손들이 문용기 열사의 위대한 정신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기리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독립을 이끈 위대한 위인을 기억하라

   
▲ 문용기 열사의 모습(사진제공 = 익산시)

2015년 말 전북교육청에서 학생들을 위해 전라북도 근현대 인물이야기라는 교재를 발간하면서 문용기 열사를 수록했다. 자라나는 학생에게 올바른 역사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독립을 이끈 위대한 위인이 우리 익산에 있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건 당연하다.

2018년 4월 4일, 따뜻한 햇볕과 흩날리는 벚꽃 아래를 걷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아이들은 뛰어 놀고, 젊은 커플은 손을 꼭 잡은 채 걷고 있다. 문용기 열사가 순국하는 순간 말했던 것처럼 이들은 모두 대한의 독립된 국민이다.

이날 만큼은 3‧1운동에 가려져 잘 알지 못하는 4‧4독립만세운동을 우리들 가슴 속에 깊이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오명관 기자 iscmnews@daum.net

<저작권자 © 익산시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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