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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이병기 선생 생가를 돌아보며

기사승인 2008.04.15  14: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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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 일본으로부터 강제적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우리의 한글마저 말살하려던 그 시절에 우리의 한글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가람 이병기 선생(사진-사진출처 네이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출생)

 
1921년에 최두선, 임경재, 권덕규, 장지영 등이 조직한 학술단체로서 우리말의 연구 발전을 목적으로 만든 단체로서 10년후에는 조선어학회(현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꾼 단체에 이병기 선생도 참여하면서 한글 보급과 아울러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시조 부흥 운동과 함께 시조를 체계화시킨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시조의 현대화에 노력하기도 했다.
 
이병기 선생은 1906년 김문수와 결혼하고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후 전남남양공립보통학교·전남제2공립보통학교·여산공립보통학교 등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고문헌 수집, 시조연구 및 창작을 시작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일제가 식민지 한국인의 말과 글을 없애기 위해 1942년 한글연구회인 조선어학회의 회원 및 관련인물들을 강제 연행, 재판에 회부한 사건) 으로 검거된 후, 함흥형무소에서 1년 가까이 복역하고 1943년 출감 후 낙향하여 농사와 고문헌 연구에 몰두했다.
 
해방직후 서울에 올라와 1946년 미군정청 편수관,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고전문학에 나타난 향토성〉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6·25전쟁중 고서(古書)를 트럭에 실어 날라 고향에 보관한 일은 널리 알려진 일화이다. 동국대학교·국민대학교·숙명여자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1952년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됐다.
 
1956년 중앙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국어국문학〉에 논문 〈별(別) 사미인곡〉·〈속(續) 사미인곡〉을 발표했다.
 
1962년 전북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고향에서 요양하다 1968년에 죽었으며, 장례는 전라북도 예총장(藝總葬)으로 치러졌다. 전주시 다가공원에 가람시비가 세워져 있고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는 생가가 있다.(자료출처 - 네이버)

이곳에도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고 화사하게 핀 꽃 사이로 보이는 생가에서는 마치 이병기 선생이 마루에 앉아 시조를 읇조리고 있는 듯하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 한글을 지키기 위해 저항했던 익산이 낳은 인물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에서 우리 조상들의 꿋꿋한 선비정신과 아울러 소중한 한글을 다시한 번 상기하면서 따뜻한 봄에 꽃구경과 아울러 이병기 선생의 기를 받아 보는 것은 어떨까?

오명관 기자 -

<저작권자 © 익산시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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